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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다미안과 이태석
이  름 : 碧元
시  간 : 2011-01-03 16:55:56 | 조회수 : 6773

 

                                                                       노재현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가끔 일상에 찌든 나의 비루함이 들통나면서 심한 부끄러움에 휩싸이는 순간이 있다. 동시에, 눈에 두텁게 낀 백태가 한꺼번에 벗겨지는 느낌이 찾아든다. 조금 전까지 머릿속에 엉켜 있던 세속 잡사(雜事), 자잘한 번민들이 기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은 보너스다. 어제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를 볼 때가 그랬다. 내전과 가난, 병마에 시달리는 수단 남부 톤즈 마을에서 8년간 봉사하다 올해 초 암으로 선종하신 고 이태석(1962~2010) 신부가 주인공이다. 

 

영화가 끝나고도 적지 않은 관객들은 선뜻 자리를 뜨지 못했다. 모두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나도 영화 보는 내내 손수건 신세를 졌다. 누군가 인터넷에 올린 ‘눈물로 눈물을 치유하는 영화’라는 감상평이 적절하지 싶다. 고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살아남아 영화를 보는 이들은 정화(淨化)되는 느낌을 선사받는다. 이태석 신부의 어떤 면이 그런 힘을 발휘했을까. 

 

그는 부산의 ‘세발자전거를 타고 놀기도 힘든’ 비탈진 산동네에서 자랐다. 10남매 중 9번째. 동네 성당이 유일한 놀이터였다. 아홉 살 때 부친은 작고했고, 모친이 자갈치 시장에서 삯바느질 해가며 자식들을 키웠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성당에서 다미안 신부(1840~1889)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보고 같은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벨기에 출신인 다미안은 하와이 몰로카이 섬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헌신한 가톨릭 신부다. 그 자신도 한센병에 걸려 49세로 선종했고, 지난해에 성인 반열에 올랐다. 

 

아들 태석이 공부를 잘해 인제의대에 진학했을 때 모친은 “대통령 된 것보다 더 기뻤다.” 그러나 의대 졸업 후 그는 사제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광주가톨릭대에 진학한다. 이미 형(신부)과 누나(수녀)를 하느님에게 바친 모친이 눈물로 말렸지만, 이태석 역시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를 설득했다. 그리고 2001년 사제 서품을 받고서 아프리카 수단으로 떠난다. 남부 수단 톤즈 마을의 유일한 의사. 하루 300여 명의 환자가 몰렸고, 100㎞ 떨어진 곳에서 며칠씩 걸어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이슬람권 환자들도 반겼다. “가난과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죽음의 늪에서 뛰쳐나온 아이들을 보니 가톨릭이니 개신교니 이슬람교니 하며 사람을 종교로 구분 짓는 것이 그들에겐 배부른 소리요 조금은 미안한 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이태석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이 신부는 손수 벽돌을 찍어 병원 건물을 세웠다. 학교를 지어 초·중·고교 과정을 개설했다. 그가 조직한 35인조 브라스밴드는 수단의 명물이 되었다. 톤즈 근처의 한센인 집단 거주지는 이 신부가 애착을 갖고 자주 들르던 곳이었다. 거리낌 없이 한센인들과 어울리는 영화 속 이 신부는 130년 전 하와이에서 한센병 환자들과 동고동락하던 다미안 신부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 

 

재작년 11월 휴가차 입국한 그는 지인의 권유로 난생처음 건강검진을 받고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암 선고 1주일 후 밝은 표정으로 수단 어린이들을 위한 모금 음악회에 나와 통기타 치며 노래 부른다. ‘너의 마음 나를 주고 나의 그것 너 받으리. 우리의 세상을 둘이서 만들자…’. “우물을 파다 왔는데”라며 톤즈 마을만 생각하던 그는 끝내 아프리카행 비행기를 다시 타지 못하고 올해 1월 14일 오전 5시35분 하느님 곁으로 떠났다. 다미안 신부보다 한 해 이른 48세였다.

 

 

 민망하고 부끄러운 고백. 사실 나도 어린 시절 성당에서 다미안 신부 일대기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옛날 같은 영화를 보았어도 범속(凡俗)한 지금의 나와 이태석 신부는 하늘과 땅 차이 이상이다. 올해는 일부 성직자나 신자들이 일반인들에게 거꾸로 ‘걱정’을 끼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래도 이태석 같은 분이 있기에 비종교인들이 종교에 대한 기대를 접지 않는다. 오늘은 마침 크리스마스 이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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